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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오롯이

교단일기 #46

 

글 | 이주희 회원

 

 

 

여름 방학 동안 헤어져 있던 아이들에게 궁금한 안부를 물을 때는 문자나 카톡 메시지가 아닌 엽서를 써 보낸다. 관제엽서를 사러 가는 우체국의 길, 돌아와 쌓여있는 엽서를 보며 써야지 하면서도 미루는 시간들, 마음먹고 앉아 쓰는 한 장 한 장의 엽서. 그리고 도착한 엽서를 읽을 아이들의 표정이 먼저 담겨 있는 엽서.

 

 

수업 시간마다 갑자기 앞으로 나오는 아이가 있다. 아이 나름의 용무가 있다. 지우개가 없어졌다거나, 짝이 뭐라고 한다거나, 엄마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등의 일들이다. 한창 진행 중인 수업이 툭 끊기는 일이 다반사다.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고집이 있어서 아이들과 충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함께 모둠을 하는 아이들도 어려움을 호소하고 교사인 나 역시도 그렇다. 그 불편함은 그 아이를 나로부터 멀리 위치하게 하는데 충분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선생님을 여러 차례 부른다. 어제 있었던 일부터 떠오르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한 두 번은 다정히 눈도 마주치고 대답도 하는데 싱거운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음부터는 대답이 안 나오고 바쁜 척 일을 하게 된다. ‘, 나를 그만 불렀으면, 힘들다.’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에 쓰였다 지워진다. 그런 우리의 관계, 나만 불편한 게 아니라 그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아이에게 엽서를 쓸 차례다. ‘하민아 안녕!’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였는데도 마음의 불편함이 와르르 쏟아진다. 두드리던 자판을 잠깐 멈추었다. 그 잠깐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되어 지난 학기 동안의 일을 쫓아간다.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뒤져보지만 떠오르질 않는다. 이상하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술술 나오던 말이 이 아이 이름 앞에 딱 멈춰 섰으니 말이다. 큰마음을 먹고 시작한 엽서 쓰기는 그렇게 중단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왜 할 말이 없을까?를 생각하여 본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철저한 이익의 유무, 편함과 불편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위치를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관계를 만들어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그럴싸한 포장을 벗기면 나오는 나의 모습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프레임은 교실 안에서도 열심히 작동 중이다.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도움은커녕 방해가 된다면 나로부터 멀리에 그 아이를 두는 것이다. 멀어진 거리만큼 쌓여가는 미움과 불신, 속단과 잘못들은 줄줄이 생겨나고 그러면 관계는 쉽게 어그러지곤 한다. 내 마음의 나침반이 이러하니 그 아이에게 쓸 말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 괴롭다. 나는 어쩌다 이런 마음만 가득하게 되었나. 나를 불편하게 했던 아이의 모습을 쫓던 생각은 가시덤불 같은 내 마음으로 돌아와 깊은 번민의 번민을 거듭하게 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개학은 가까워졌다. 한쪽에 두었던 엽서를 꺼내 아이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하민아, 하민이라고 너의 이름을 불렀더니 너랑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너의 이름을 자꾸만 불러보고 싶다.’ 라고 썼다. 이렇게 시작된 엽서는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3학년 시간,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들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자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고 싶다는 말도 적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한줄 한 줄을 쓰면서 내가 만든 마음의 장애물을 지나니 비로소 느껴지는 한 아이의 존재. 존재 앞에서는 그동안 붙였던 조건 같은 수식들은 스스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없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순간을 느끼게 한다.

 

 

다 쓴 관제엽서를 부치러 가는 우체국의 길, 아이들이 사는 집집마다 엽서가 배달되는 시간들, 아이들의 손에서 읽혀지는 엽서 그리고 무엇보다 오롯이 만나는 너.

 

 

 

 

 

 

 

 

 

 


*이주희 회원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매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