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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글] 우리 안에 있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글 | 홍주형 회원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티카의 강도입니다. 그는 아테네 교외에 있는 한 언덕에 집을 짓고 강도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그는 지나가는 길손을 초대하여 자기 침대에 눕혀서 키가 큰 나그네는 잘라 죽이고, 키가 작은 나그네는 늘여서 죽이곤 했습니다. 그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어서 누구도 그 침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운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임의로 결정한 기준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에 따랐다는 명분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다 위험한 것이고,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누구나 가슴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씩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합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 내 판단을 절대화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섭니다. 세상 어디에도 내 기준에 딱 부합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래서 문제고,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임의로 결정한 기준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에 따랐다는 명분에 집착하게 됩니다.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비판의식이 발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주창형·대변형(advocacy) 운동을 하는 단체 활동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비판의식과 냉철함이 시민운동을 발전시켰고 사회를 진일보 할 수 있도록 만들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분명한 사회적 구조에서는 비판적 기준을 가지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 되어가고 민주주의의 역량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비판적 눈이 오히려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름’이 곧 ‘틀림’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순간에 단체의 입장과 다른 의견들이 나오면 서로를 가르는 장벽이 만들어집니다. 이 장벽이 높아 갈수록 장벽 너머의 있는 이들의 생각은 존중되지 못하고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소통의 부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바로보기에 적대적 관계는 시작되고 공감의 능력을 단절되어 갑니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적이며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적 배려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라고 한 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언제부터인지 확신에 찬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부담이 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이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들은 항상 가르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창조적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나의 옳음이 강할수록 소통할 여지는 줄어들게 됩니다. 이웃들의 생각과 말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들이 오히려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자기 기준과 판단이 절대적인 사람일수록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극단의 경향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수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부모들의 잔소리는 되새겨 보면 좋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청소년의 입장에서 들을 때는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몸서리치게 듣기가 싫습니다. 공감하는 마음이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일수록 옆 사람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에 대한 절절한 아픔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보다 이웃에 대해 존중해 주고 함께 아파해 줄 동무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자신을 상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가을빛으로 곱게 물들어가 가는 시기입니다. 자연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있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치우고 그곳에 공감의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 가을 나와 다르다고 멀리했던 벗들에게 공감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